통찰

백룸(The Backrooms): 인간의 불안이 지은 무한한 미로

hyunmook 2026. 6. 1.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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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영화 <백룸>을 보고 왔다. 평소 귀신이나 미신을 믿지 않는 내게 이 영화는 그리 무섭지 않았다. 아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공포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원래 나는 신의 존재나 영적 존재, 혹은 사후세계 같은 초자연적인 것들을 믿지 않는다. 남들이 공포 영화를 보며 가짜 허상에 감정을 이입할 때, 나는 스크린 너머의 연출을 먼저 본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장면에 생물학적으로 깜짝 놀라기는 해도, '음향 타이밍을 잘 썼네', '배우의 호러 연기가 훌륭하다' 같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감상으로 전환된다. 가짜라는 것을 뇌가 인지하는 순간 공포는 지속되지 않는다.

 

특히 이번 영화 백룸은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라기보다는, 내 캐릭터가 죽어도 다른 캐릭터로 플레이가 이어지는 공포 게임 시뮬레이션을 관람하는 기분이었다. 여기에 대중성을 내다 버린 예술영화 특유의 연출까지 더해지니 조금 지겹기도 했다.

 

불안이 불안을 키워 만들어낸 내면의 감옥

비록 장르 영화로서의 연출과 재미는 아쉬웠지만, 영화가 남긴 세계관을 곱씹다 보니 감독의 의도가 이런게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이 끝없이 반복되는 노란 벽지의 미로는 초자연적인 괴물이 사는 소굴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 세계를 고스란히 시각화한 공간이라는 부분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확실성을 혐오하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두려워하도록 진화했다. 영화 속 백룸은 출구가 없고, 사방이 기하학적 대칭을 이루며, 어떤 이정표도 찾을 수 없는 극단적인 불확실성의 공간이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마음의 감옥'과 소름 돋게 닮아 있다.

 

외부의 거대한 적이 우리를 가두는 게 아니다. 우리 내면에 도사린 실체 없는 불안정함, 그 불안이라는 감정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파고들다 보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한한 미로를 지어낸다. 결국 불안이 불안을 스스로 키워내 거대한 감옥을 만들어놓고, 그 나약함 속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 갇혀버리는 인간의 서글픈 초상. 이것이 내가 백룸이라는 기괴한 영화에서 감독과 나눈 대화다.

 

하루 한 페이지의 기록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 지어낸 이 생각의 미로, 내면의 백룸에서 어떻게 탈출해야 할까? 영화처럼 출구를 찾아 영원히 헤매야 할까? 나는 '하루 한 페이지 일기 쓰기'라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도구를 제안하고 싶다.

 

형태가 없는 불안은 통제할 수 없기에 무한히 확장된다. 하지만 매일 밤 하루를 '딱 한 페이지'라는 제한된 공간에 글로 정리하는 순간, 뇌 속에서 날뛰던 불안에는 명확한 경계선이 그어진다. 막연한 두려움을 활자로 박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무서운 미지의 괴물이 아니라 해치울 수 있는 구체적인 문제로 인식된다.

 

내 삶을 제3자의 시선으로 객관화하여 일기장에 복기하는 행위는, 마치 공포 영화를 보며 "연출 잘하네"라고 감상을 남기는 것과 같다.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뇌의 이성 영역을 깨워 감정의 과부하를 막아주는 것이다. 하루를 한 페이지의 글로 마감하는 루틴은, 뇌 속에 쌓인 쓸데없는 불안의 메모리를 청소하는 가장 완벽한 환기창이다.

 

사각거리는 만년필 끝에 하루를 담아내는 즐거움

마지막으로 소소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나는 만년필로 종이 위에 무언가를 끄적끄적 거리는 취미가 있다. 사각거리는 아날로그적인 촉감과 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복잡했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혹시 요즘 이렇다 할 취미가 없어 고민이거나, 문득 밀려드는 생각의 미로 때문에 마음이 어지러운 사람이 있다면 만년필 한 자루로 하루하루 일기를 쓰는 취미를 가져보는 건 어떨까 권하고 싶다.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위로를 줄 것이다. 게다가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문득 먼지 쌓인 일기장을 다시 읽어보게 된다면, 아련한 옛 추억이 새록새록 생각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시절의 내가 이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었구나' 하는 소박하면서도 깊은 즐거움 또한 분명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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