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

만년필 5자루 후기 및 도구의 본질

hyunmook 2026. 6. 4.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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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문과 8대 자격증 중 하나의 고시 공부를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루에 수십 페이지씩 논술형 답안지를 빽빽하게 채워내야 하는 일과 속에서, 내 손가락의 관절을 보호하고자 만년필을 접하게 됐다. 그렇게 전투용으로 쓰기 위해 영입했던 펠리칸 M200과 M205를 시작으로, 내 책상 위에는 만년필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사실 내 컬렉션에는 명확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고시생에게 잉크가 끊기는 것은 전장에서 탄약이 떨어지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내가 선택한 다섯 자루의 펜들은 잉크를 보다 많이 담을 수 있는 일체형 빌트인(Built-in)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펠리칸 시리즈와 라미 2000은 배럴 자체를 잉크 탱크로 쓰는 '피스톤 필러(Piston Filler)' 방식을, 파카 51은 내부에 고정된 색을 압착하는 '에어로매트릭(Aerometric)' 방식을 채택했다. 오늘은 만년필 다섯 자루를 소개하려 한다.

만년필 컬렉션, 아래부터 펠리칸 M205, M200, M400, 파카51 빈티지 4times, 라미2000

 

1. 펠리칸 M200 & M205 : 만능 전투용

가장 처음 내 손에 들어와 고시 공부의 전 과정을 함께한 펜들이다. 화려한 장식 없이 묵묵하게 제 역할을 다하는 이 스틸닙들은 현존하는 가장 완벽한 '전투용 펜'이라고 생각한다. 배럴 전체에 잉크를 채우는 피스톤 필러 구조 덕분에 한 번 충전하면 판례를 필기하고 답안지를 채워 나갈 때도 잉크가 마르거나 흐름이 끊기는 법이 거의 없었다. 단단하고 야무지게 내 손귀를 지탱해 준 이 두 자루는 단순한 필기구가 아니라, 인생의 치열했던 한 페이지를 함께 버텨낸 동반자다.
 
이 둘은 아무 잉크나 아무 종이에나 써도 대충 아무렇게나 잘 버텨주고, 필압이나 필기 각도도 크게 타지 않는 전천후 전투용 펜 그 자체라고 보면 된다.
 

2. 라미 2000 : 세련됨 속에 숨겨진 예민함

바우하우스 특유의 미래지향적이고 미니멀한 디자인에 끌려 선택한 라미 2000. 이 녀석 역시 매끄러운 마크롤론 바디 내부에 피스톤 메커니즘을 완벽히 숨겨둔 빌트인 구조의 강자다. 촉이 살짝 숨겨진 후디드 닙(Hooded Nib)의 매력이 독보적인 멋진 펜이지만, 막상 실전에 투입해보니 생각보다 아주 까다로운 녀석이었다.
 
이른바 '스위트 스폿(Sweet Spot)'이라 불리는 필기 각도를 너무 탄다. 글씨를 적을 때 펜을 쥐는 각도를 조금만 잘못 틀어도 헛발질이 나거나 흐름이 끊긴다. 게다가 배럴이 생각보다 두꺼워서 필기를 오래 할 때는 손아귀가 조금 뻐근해지기도 한다. 대용량 탱크를 탑재해 언제든 달릴 준비는 되어 있으나 항상 나의 자세와 각도를 신경 써서 대접해 줘야 하는 예민한 도구다.
 
다만, 가끔 필기를 하거나 일상적인 메모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후디드 닙 구조 덕분에 닙 마름도 거의 없고 잉크도 많이 들어가서 충분히 추천할 만한 편이다. 추천하는 이유에는 디자인도 한몫 한다.

3. 파카 51 빈티지 4times : 흐름이 넘치니 잉크 매칭 주의 필요

만년필 역사의 전설이라는 명성을 듣고 영입한 파카 51 빈티지. 확실히 역사적인 레전드답게 손에 쥘 때 착 감긴다. 이 녀석은 피스톤 필러 방식인 다른 네 자루와 달리, 배럴을 열고 내부의 금속 압착 판을 눌러 잉크 색(Sac)을 채우는 전설적인 '에어로매트릭(Aerometric)' 방식을 고수한다. 잔고장이 없고 가혹한 환경에서도 작동하는 빌트인 충전의 조상 격이다.
 
하지만 이 녀석을 처음 쓸 때는 그야말로 '잉크 홍수'라는 재앙에 가까웠다. 원래 일기장으로 쓰던 사틴 노트에 글을 적는데 뒷장을 넘어 그 다음 장에도 잉크 점이 찍힐 정도로 흐름이 넘쳐났다. 처음엔 종이가 문제인가 싶어 만년필 전용지로 워낙 유명해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미도리 MD 노트를 꺼내 써보았지만, 그 좋은 MD 노트마저도 뒷장에 훤히 비칠 정도로 번져버렸다.
 
그제야 범인이 종이가 아닌 흐름이 방대한 펜과 잉크의 조합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흐름이 과하게 터지는 일본의 '이로시주쿠' 잉크가 파카 51의 넘치는 분출력을 만나 폭주했던 것이다. 결국 잉크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흐름이 박하다고 유명한 독일산 '펠리칸 4001 터콰이즈 블루'를 채워 넣었다. 그러자 과했던 흐름이 단숨에 잡히며, 번짐 없이 청량하고 정갈한 필감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잉크 고유의 화사한 색감까지 매력적으로 온전히 표현해 준다. 외형이나 하드웨어 탓을 하기 전에, 내부를 채우는 소프트웨어의 본질적인 궁합을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는 교훈을 준 매력적인 명작이다.

4. 펠리칸 M400 : 화려한 부드러움

가장 최근에 내 컬렉션에 합류한 녀석이다.

펠리칸 m400의 14C 닙, Pelikan 4001 Brilliant Brown을 사용중이라 닙에 갈색 잉크가 묻어있는 모습

금색과 은색이 화려하게 조화를 이룬 투톤닙은 내가 가진 펜들 중 가장 압도적으로 고급스러운 미감을 자랑한다. 특히 촉에 선명하게 새겨진 '14C-585' 마크가 증명하듯, 요즘 나오는 단단한 현대판 14K 닙과는 궤를 달리하는 은은한 옛 감성의 구형 금닙이다. 펠리칸의 아이덴티티인 대용량 피스톤 필러 기능은 유지하면서도 필감 역시 기존 M200보다 확실히 부드럽고 낭창거려 스펙만 놓고 보면 단연 컬렉션의 정점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내 손은 자꾸만 이 화려하고 부들거리는 M400을 밀어내고, 다시 투박하고 단단한 스틸닙 M200을 쥐게 된다. M200의 단단하고 샤프한 필감이 오랜 시간 내 손에 완벽히 익어버린 탓일까? 역시 나에게는 영원한 '전투용 GOAT'다.

마치며: 도구는 가격이 아니라 '역사'로 완성된다

결국 비싸고 화려한 14C 투톤닙이나 역사적인 빈티지 명작이 무조건 내 최고의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 만년필들은 피스톤 필러와 에어로매트릭이라는 서로 다른 메커니즘을 취하고 있지만, '지속적인 필기량 확보를 위한 빌트인 일체형 구조'라는 동일한 목적을 공유한다. 그리고 정작 내 마음을 가장 편안하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만년필의 진짜 가치는 가격표의 숫자가 아니라, 나와 함께 보낸 시간의 밀도와 손끝이 기억하는 역사가 결정하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는 수십만 원짜리 압도적인 구형 금닙보다, 수도 없이 판례와 고뇌를 잉크 중단 없이 받아적으며 함께 땀 흘렸던 스틸닙 M200이 훨씬 더 편안하고 가치 있는 '원픽'인 것처럼 말이다.
 
인생도 이와 닮아있지 않을까.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화려하고 비싼 기준에 나를 맞추기보다, 나의 치열했던 과거와 상흔이 묻어있는 투박한 시스템이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일지도 모른다.
 
혹시 삶의 방향을 잃고 마음이 어지럽다면, 대단한 장비병에 걸릴 필요 없이 그저 내 손에 편안하고 든든한 일체형 펜 한 자루를 쥐고 눈앞의 하루를 기록해 보길 권한다. 나중에 먼지 쌓인 일기장을 다시 펼쳤을 때, 그 펜 끝이 기억하는 당신의 치열했던 흔적들이 세상 그 어떤 명검보다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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